스테레오타입(20100211)

스테레오타입(20100211)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라는 말은 진부하거나 상투적인 말과 행동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집단을 범주화하는 단순화된 도식의 하나로 특정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나 개인차 혹은 능력을 무시한 채 단순히 그 개인이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 범주로 귀속시키려는 관념이나 기대 등과 같은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한편 스테레오(stereo)라는 말은 스피커의 대칭구성을 통해 둘 이상의 채널을 사용하는 소리 재생을 의미합니다. 스테레오가 발명되어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음악은 풍성함이 덜 하였을 것입니다. 양쪽의 소리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여주는 스테레오 기기는 스테레오타입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사람과 문화를 획일화시키지 않는 다양성을 제공해 줍니다. 따라서 스테레오타입이라는 말이 왜 스테레오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살아가며 스테레오적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부분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어느 한 주장이나 한 개념 등을 좋아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쪽 만을 추종하다 보면 열린 사고 속에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주장 한편에 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 채 외 나무 다리의 건너 편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유연하고 열린 자세입니다. 따라서 스테레오적으로 느끼고 그것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은 그 자세 자체가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한 이동통신사의 선전은 꼭 막힌 세태를 반영한 듯하여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네 맘대로 해!”라고 외치는 광고는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의 삶을 주장하는 듯하여 그 선전을 들을 때 마다 다른 채널로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까지 합니다. 가뜩이나 타인의 의견은 존중할 줄 모르고 고장 난 레코드마냥 자신의 진부한 주장만 반복하고 있는 정치권을 보면 진짜 스테레오타입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기만 하구요.

 

예수님은 삶의 다양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많은 부분은 스테로오타입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제사장 그룹의 편견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건전하게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스테레오타입과 같은 편향되고 상투적인 일상을 배제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그것이 주는 풍성함을 누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소리가 있고,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는 소리는 없습니다.(쉬운성경 고린도전서 14:10)

by 새벽이슬 | 2010/02/11 09:56 | 새벽이슬 신앙일기 | 트랙백 | 덧글(0)

강한 타성(20100210)

강한 타성(20100210)

 

실패를 하는 유형을 들여다보면 많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강한 타성(Active Inertia)을 들 수 있습니다. 실패를 유발하는 타성은 잘못된 타성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잘 들여진 타성도 실패를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타성은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둑에서도 잘못 둔 악수는 금방 탄식을 자아내며 그에 따른 수습책을 만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결정적 패착은 악수가 아니라 괜찮은 수처럼 보이는 것이 나중에 복기를 해보면 그것이 결정적 패착임이 나타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토요타의 추락을 보며 강한 긍정적 타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절감하게 합니다. 토요타는 끊임없는 원가 절감 노력을 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기업입니다. 토요타 간반 시스템이라든가 토요타식 마른 행주도 다시 짜라!’등과 같은 경구는 많은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하였는데 바로 그 긍정적 타성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절대적 원가절감 노력이 너무 강하여브레이크 결함과 같은 문제를 초기에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니 문제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 긍정적 타성이 매우 강력한 관성을 가지고 있어 외부의 더 강력한 충격이 오지 않는 이상 그 타성이 바뀌어지거나 경보음을 내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결국 소비자의 저항과 미국정부의 압력이라는 거대한 충격이 오고서야 절대적 타성이 경보음을 내고 방향을 바꾸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업 전략을 공부하다 보면 가장 강한 부분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으로 되돌아 오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따라서 매우 긍정적 문화와 습성이라 할지라도 주기적으로 냉철하고 제 삼자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변화를 도모해야 합니다. 잘나갈 때 조심하는 낮은 자세, 늘 겸손으로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야 말로 우리를 강한 타성으로부터 건져낼 유일한 길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베드로전서 5:8-9)

 

더 강한 타성이 우리를 붙잡아 더 큰 나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늘 돌아 보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겪게 되는 고난 역시 우리의 강한 타성을 그 깊은 곳에서 자각하게 해 주는 순기능적 영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 고난조차도 자신을 개조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으므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by 새벽이슬 | 2010/02/10 17:33 | 새벽이슬 신앙일기 | 트랙백 | 덧글(0)

생각의 날개(20100209)

생각의 날개(20100209)

 

저는 장사익 선생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의 노래가 참으로 좋아 좋아하기도 하지만, 별볼일 없던 주변 인생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인생 후반전에 찾아 인생을 역전시킨 인물이기에 더욱 더 좋아하게 되는 분입니다.

 

전 늘 즐거워유. 노래를 부르기 전엔 얼굴을 찡그렸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후 얼굴이 펴졌슈. 아무래도 웃는 사람이 복 받고 일거리도 생기는 게 아니겄시유. 지 노래가 대부분 슬픈 건 사실이지만 슬퍼서 짜증나는 게 아니라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뭐라나 카타르시스가 된대유. 그걸생산적 슬픔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유.” 늘 웃는 얼굴이 매력인 그이지만 처음부터 웃음을 머금은 매력적 인상도 아니었고 그런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지 경험에 비추어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유. 만약 지가 처음부터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오늘의 지는 없을거구먼유. 절박할수록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넉넉하게 생각해야 해유. 사람은 누구나 꽃을 피울 때가 있다구 믿어유. 그게 인생이여유.”

 

25년 동안 15개 직장과 직업을 전전하며 인정도 받지 못하고 대접도 받지 못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현실감이 더 있는 충고 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지가 원래 자발(참을성)이 없시유. 학벌도, 능력도 없구. 술 담배도 못해유. 근데 꿈은 많아유. 지 이름이 생각 사()에 날개 익()이니 생각이 날아다니지 않겄시유.”

 

자신의 꿈을 믿은 사람, 자신의 생각에 날개를 달아 날아 오를 때까지 꿈을 접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저는 그를 좋아합니다. 장사익 선생을 보면 인생의 성공은 학벌도 실력도 능력도 아닌 꿈에 달려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꿈 즉 생각의 날개를 접거나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립보서 3:15)

by 새벽이슬 | 2010/02/10 17:32 | 새벽이슬 신앙일기 | 트랙백 | 덧글(0)

콩나물 기르기(20100208)

콩나물 기르기(20100208)

 

우리나라 대표적 음식물 중의 하나가 콩나물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한식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여러 한식의 세계화가 추진되고 또 큰 기대를 갖게 하지만 한국인의 입맛과 정서에는 콩나물이 김치와 더불어 가장 사랑 받는 음식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콩나물이 재배된 기원은 제법 오래되어 삼국시대 말이나 고려 시대 초기로 추정합니다. 935년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태광태사 배현경이 식량 부족으로 허덕이던 군사들에게 콩을 냇물에 담가 콩나물을 불리어 먹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법 오래된 역사를 우리와 함께한 것이 콩나물이라 생각됩니다.

 

콩나물 기르기는 또 다른 재미와 흥미를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물이 잘 통하는 시루나 화분에 재와 같이 통수가 잘되는 것을 넣은 후 까만 쥐눈이 콩을 뿌려 놓고 빛을 완전히 막도록 이불 등으로 씌워 놓고 따듯한 아랫목에 놓아두면 준비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하루에 수 차례씩 물을 뿌려 주면 콩나물은 무슨 대단한 양분을 준 것도 아닌데 부쩍부쩍 자라납니다. 콩나물은 다른 식물과 다르게 물을 주어도 용기의 특성상 뿌리에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고 말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도 콩나물은 그걸 흡수하여 성장을 합니다. 그것도 다른 식물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말입니다.

 

콩나물이 자라나는 모습을 눈에 그려보며 제가 아침마다 보내드리는 메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메일이 우리의 삶 속에 크게 영향을 주는 고성능 비료와 같은 자양분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콩나물이 흘러가는 물을 만나서도 부쩍 자라나듯 저의 이 작은 메일을 통해 하루 한때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소망을 가지며 기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저의 메일이 우리 마음과 생각의 어느 것에 걸릴지 알지도 못하고 흘러 지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키워줄 수 있겠구나 하면서 용기를 가져보았습니다. 보잘것없고 부족한 저의 글이 작게나마 우리의 삶에 활력이 되기를 진정으로 소망하며 저와 여러분 모두가 콩나물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태복음 18:10)

by 새벽이슬 | 2010/02/10 17:32 | 새벽이슬 신앙일기 | 트랙백 | 덧글(0)

포정해우(20100205)

포정해우(20100205)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을 보며 감탄한 문혜공에게 포정이 대답하였습니다. “처음에 신이 소를 잡을 때 보이는 것은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정신으로써 소를 대하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오관과 지각의 작용은 멈춰지고 정신의 작용만이 행해집니다. 천리에 의거하여 큰 틈을 쳐나가고, 큰 틈바구니를 따라 소의 원래의 구조대로 좆다 보니 경락이 얽혀있는 곳과 살이 엉켜있는 곳에 부딪힌 적이 없는데,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솜씨 좋은 백정은 일년에 한 번씩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가르기 때문이요, 평범한 백정은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니 이는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의 칼은 십 구 년이 되었고 잡은 소만해도 수천 마리이나, 칼날은 막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이러하지만 뼈 마디가 교차하며 모여 있는 것을 마주치게 되면 저는 그 하기 어려움을 보고는 조심조심 삼가며, 시선을 모으고, 행동을 천천히 합니다.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 털썩하는 소리가 나면 이미 분해되어 흙덩이가 땅 위에 던져진 것처럼 됩니다.”

 

몰입(Flow)’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라는 질문에 몰입즉 플로우(flow)의 상태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몰입 속에서 최고의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몰입은 단순히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것을 넘어 생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의식을 확장해 자기진화를 이끌어낸다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플로우는 무질서로 돌아가려는 악한 힘, 곧 잡념 때문에 방해를 받는데 완전한 플로우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도전과 기술을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모아 몰입의 상태에 이르러야 자기성취도 자기진화도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음은 동서양과 고금을 넘어선 진리인가 봅니다. 우리의 삶에 몰입을 경험하는 놀라움이 늘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 몰입이 예수님을 향한 자연스러운 흐름(Flow)이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이 정신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지만, 그 정신이 꺾인다면, 누가 그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표준새번역 잠언 18:14)

 

by 새벽이슬 | 2010/02/10 17:31 | 새벽이슬 신앙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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